Tuesday, February 22, 2011

부럼 깨기

어릴 때, 손 꼽아 기다렸던 날 중에 한 날이 정월 대 보름이었다.
그 날은 내가 좋아하던 약식을 맘껏 먹을 수 있던 날이라 설이 지나면서부터 기다렸었는데,
정확한 날짜를 알고 기다리던 것이 아니고 찹쌀을 물에 담그고, 마른 나물들이 광에서 나와 있으면 그 날이구나 하며 기다렸었다.
할머니가 돌아 가시기 전까지 정월 보름날은 우리 집에서 꼭 지켜졌던 명절이었다.
이른 새벽 어둠 컴컴할 때, 할머니는 아직 자고 있는 손자 손녀들을 깨워 남보다 먼저호두와 깨금(개암), 밤을 어금니로 꽉 물어 ‘딱’ 소리가 나도록 깨라고 하셨다.
그리고 ‘부럼이요’를 크게 외치면 할머니는 모든 잡귀는 물러가고, 올해 부스럼이나 종기 나지 않고 튼튼한 이(치아)로 한해 건강 하라는 축복을 하며, 차가운 술(정종)을 한 모금씩 마시게 한 후 세상의 좋은 소리만 들으라고 귀를 비벼 주셨다.
새벽부터 마신 찬 술로 얼얼해서는 대문 앞에 서서, 내 더위 사가라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치고 하루를 시작 했다. 저녁에 잘 먹을 거라며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한 후에는 복 조리를 방마다 걸어 놓게 하셨고 내 더위 사간 사람에게는 부채를 갖다 주라고도 하셨다.
엄마는 하루 종일 음식 하느라 바쁘고, 점심 건너 뛰고, 많은 종류의 나물만 한 상 차려진 이른 저녁을 약식과 오곡 밥으로 먹고, 대문을 활짝 열어 어두워지기 전 집안 곳곳에 등잔 불을 켜 놓은 후 부뚜막에는 음식들을 담아 덮어 놓고(밤에 누군가가 와서 가져 가도록), 설에 날렸던 연에 붓글씨로 무어라고 쓴 후 달이 뜨기 전, 동네 큰 다리로 데리고 나가 올 한해 소원을 빌라 하며 연을 날려 보내 셨다.
그리고 우리는 다리를 몇 번씩 왔다 갔다 했다. 한해 동안 다리 아프지 말게 해달라고 빌면서.
사실 다리 위를 걸으면서 우리들의 관심은 둑방에서 하는 쥐불 놀이이었다.
깨진 두레박에 못 구멍을 숭숭 내거나, 솜을 넣어 짚으로 단단하게 뭉쳐 둥글게 만든 것에 송진을 발라서 불을 붙여 돌리며 동네 별로 시합을 하기도 했었다.

이번 주 대보름에 대해 수업을 했다.
대보름의 유래부터 음식, 놀이까지 설명을 해주고 준비해간 부럼 재료로 부럼 깨기를 했다.
귀밝이 술의 의미를 설명 하며 식혜로 대신 했고, 다리 밟기는 학교 주차장에서 대신 하며
할머니가 우리에게 해 주셨던 것처럼 학생 한 아이씩에게 똑같이 해주었다.
더위 팔기와 종이 접기로 부채를 만들어 선물을 하기도 하고 달에 관한 동요 몇 가지를 부르고 아리랑까지 배워 불렀다.
그런데, 한 학생이 수업 시간 내내 못 마땅한 듯, 아니면 흥미가 없는 듯 유독 눈에 띄었다.
이유인즉 크리스천 이기 때문이란다.
대략난감(大略難堪), 우리 말 어법에 어긋나는 말이지만 가장 적절한 표현으로 이 단어가 떠올랐다.
세대가 바뀌고 시대가 변하여 고국의 풍속을 꼭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모국을 알기 위해 배우고 경험하는 것인데, 이렇게 까지 어린 학생이 말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 했기에 몹시 당황했다.
한 나라의 고유 풍속이 문화와 역사로 이어지는 것이 분명한데, 왜 우리들은 전통 풍속을 종교와 연관 지으며 배우기 조차 거부 하는 것일까!
가정이 핵가족화 되고, 부부 모두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작은 명절들을 그냥 지나치거나, 잊고 있는 것일 텐데, 굳이 이유를 들어 배우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전통 풍습에 대해 가정에서 보고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가끔은 가정에서 부모들이 경험한 명절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들려 주어 모국을 배우는데 거부감 없이 받아 들이고, 학교에서 하는 행사에도 함께 참석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Thursday, January 27, 2011

일기가성 (一氣呵成)

「선생님~, 오늘은 와꺼야? 」
교무실 앞을 지나던 노엘이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자 달려와 안기며 한 인사다.
지난 주, 플로리다 지역 협의회 교사 연수회에 북 가주 협의회에서 편찬한 역사 문화 교재 강사로 참석 하느라 학교를 결근 했었는데, 2주 만에 만난 아이가 이렇게 반가움을 표했다.
플로리다에 다녀 왔다고 하니 반 학생들 모두 Sea World 에 다녀 온 줄 알고, 질문을 했다.
일일이 대답하다 보니 첫째 시간 수업은「말하기」 수업이 되고 말았다.

매 주 한 시간씩 역사 문화 교재로 수업을 하다 보니 학생들은 일반 수업 시간보다 역사 문화 시간을 더 기다리고 더 흥미 있어 하고, 더 진지하게 공부에 몰두 한다.
오늘은 한국의 고유 명절을 앞두고 한복에 대해 공부를 했다.
한복의 명칭, 입는 순서, 고름 매는 방법까지 공부한 후 종이 접기로 한복을 만들어 상황 극 놀이를 했다.
바지 저고리와 치마 저고리를 각각 만들어 플라스틱 스푼 뒷면을 이용해 머리와 얼굴의 표정을 그려 넣은 후 한 사람이 남녀 역할 모두 하며 한복에 대한 생각을 말하게 했다.
대부분 학생들은 쑥스러운 듯 아주 평범한 대화를 하는데 반면, 지난 여름 한국을 다녀 왔다는 신성이는 의외의 대화를 시도하였다.
「엄마, 한국학교에 한복 입고 가야 해」
「그래 입어」
「한국에서는 한복 공부 안 하는데 우리 학교는 공부해」
「한국은 설날 집에서 노는데 우리는 학교에서 한복 입고 놀아」
한국을 떠난 지 오래 되어 지금 한국의 교육 과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잘 모르지만, 학생의 대화처럼 한국에서는 학교에 한복을 입고 가지 않았었고, 초등 학교 시절 한복에 대해 배우지 않았던 것 같고, 설날은 휴일이라 학교에 가지 않고 동네에서 어른들이 하는 민속 놀이를 구경 했던 것으로 기억 된다.
신성이는 한복 입고 학교에 오고, 학교에서 민속 놀이를 하는 것이 너무 좋다며, 무지개 한복 (색동 저고리)이 입고 싶다면서 저고리에 색칠을 해도 되느냐고 묻는다.
이렇게 가끔, 한국의 학생들보다 동포 2세 학생들이 한국의 문화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더 정확하게 역사를 알고 있기도 한다.
플로리다 주 협의회 강의에서 어느 교사 분의 말씀에 의하면 한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중학생의 역사 상식이 동포 2세의 한국 학생보다 못해서 놀란 적이 있다고 하며, 한국에서는 한국사가 영수 과목에 밀려 대입 수능에서뿐만 아니라 공직 시험에서도 사라졌다고 안타까워 했다.
시애틀에서 만난 한 청년은 입양아로 미국에 와서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은 많은 아이들을 입양 보내는 나라로만 알고 있었는데, 한국 학교에 다니면서 한국의 뿌리와 문화를 배워 한국을 더 알게 되었다고 했다.
지난 여름, 교재 소개 및 강의를 들었던 다른 나라의 교사들도 교과서 위주의 수업보다 문화와 역사를 동영상을 보면서 수업을 하니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가끔 메일을 보내 주곤 한다.

일기가성 (一氣呵成), 2011년 청와대가 신년 화두로 선정한 사자 성어다.
명 나라 때, 두보의 시를 읽은 평론가 호응린이 한숨에 써 내려간 느낌을 받는다는 표현으로「일기가성」이라 하였지만, 두보는 책 만권을 읽은 후에야 붓이 비로소 움직였다고 고백을 했는데, 이 사자성어를 북 가주에서 편찬한 한국 역사 문화 교재에 올리고 싶다.
「일을 단숨에 몰아쳐 해냄」이란 사전적 의미를 가진 일기가성의 이면에는 책 만권을 독파하는 준비와 노력, 끈기가 있어야 했고, 「좋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일을 미루지 않고 이뤄낸다.」는 뜻을 또한 지닌 것처럼 미국 내에서, 한국 학교 내에서 절실하게 갈망하며 필요했던 사항들을 관망하지 않고 곧 시도하여, 세계 여러 나라, 미국 내 각주에서 한국 학교 교사들이 한숨에 써 내려간 느낌의 교재를 가지고 보다 쉽고 재미있게 수업할 수 있기까지 수고하신 최미영 회장님 이하 모든 분께 고마움을 전한다.

Wednesday, January 5, 2011

위대한 탄생

기쁜 하늘
내 엽븐 얼골
성경첵을 일그면
아이가
하난님을 만나다.

널븐 하늘
내 마음 해 마음
성경첵을 일그면
아이가
하난님에게로 안긴다.

숙제로 시 쓰기를 주었을 때 이제 막 고등 학생이 된 세훈이가 낸 작품이다.
아무리 읽어 봐도 고등학생의 생각으로 쓴 것 같지 않은 시 이지만, 세훈이의 얼굴을 보면 세훈이가 썼다고 믿어지는 깨끗하고 예쁜 시다.
이런 세훈이를 담임 한지도 벌써 6~7년이 지나 잊고 있었는데, 한국 지상 파 방송국에서 미주 지역을 순회하며 실시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시청하다 설마 하는 참가자가 있어, 인터넷 다시 보기를 통해 확인한 결과 그 세훈이가 맞았다.
유난히 음악에 관심이 많아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기를 즐겨 하던 미소년 세훈이가 대학생이 되어 가수의 꿈을 이뤄 보고자 오디션에서 연주하며 열창하는 모습을 보니 대견스럽기 그지 없었다.

요즈음, 한국에서의 연예 활동을 꿈 꾸는 학생들이 부쩍 많아졌다.
특히 지난해 슈퍼스타 K를 통해 재미 동포 존 박이 본국에서 좋은 성적으로 연예계에 입문한 것이 한동안 화젯거리이더니,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던 아이들은 물 만난 고기인양, 노래로 댄스로 랩으로 연주로 각자 지닌 재능으로 꿈을 향해 도전하고 싶어 한껏 들떠 있다.
그런데, 노래 말 쓴 것을 보여 주기도 하고, 발음이 어떤지 묻고, 댄스를 보여주는 아이들의 공통점은 부모님은 아직 모르고 있고, 알면 그 날로 끝이라며 전전긍긍이다.
시대가 많이 변하여 부모님들이 앞장서서 아이들의 재능을 키워 준다지만, 아직 연예계로의 입문은 아닌가 싶다.
얼마 전 대학 입학 원서를 작성할 때, 아버지가 목사님인 학생이 섹스폰 연주가가 정말 되고 싶은데, 무조건 UC 대학을 가란다고 하며, 하고 싶은 것을 했으면 좋겠는데 부모님이 자기 말을 안 들으면서, 자기가 부모님 말을 안 듣는다고 소리만 지른다는 하소연을 했다.
연말에 그 학생의 어머니와 만나게 되어 말씀을 나누다 노형건 목사님 아들인 프로그레스가 주도하는 힙합 그룹 Far East Movement에 대해 얘기를 하니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그래도 우리 애는” 하며 말꼬리를 흘려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이렇게 재능과 끼가 있고, 하고 싶은 열망이 끓는 우리 학생들에게 무조건 안 된다, 못 한다 하지만 말고 한번쯤 아이와 진지하게 대화하며, 준비를 하다가 기회가 되었을 때 아이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는 멋진 부모로 위대하게 탄생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세훈이의 노래를 심사하던 한 심사위원은 너무나 평범한 세훈이의 의상에 대해 질문을 했다.
엄마가 골라 준 셔츠를 입었다고 말하며, 가족에게 고마움을 전하던 세훈이.
이제 위대한 탄생의 일차 관문을 통과 했으니 끝까지 선전하여 위대한 탄생을 통해 위대한 탄생이 있기를 선생님도 응원한다.

Tuesday, November 30, 2010

「한국을 찾아라」홍보를 위한 행진

올 해 나는 한국 학교 교사 25년 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어(국문학)를 전공한 것도 아닌데, 한국어(한글)교사를 하며 느끼는 점은 늘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름 교재를 구입하여 공부하고, 협회 연수는 거의 다 참석하며 듣고 배워 내 수업 자료로 만들어 사용했지만, 한계가 느껴지고 있을 때 온 라인 강좌라는 프로그램이 생기기 시작하여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은 했지만 쉽게 오지 않았었다.
그런데, 올 여름 재외동포 재단과 함께 디지털 서울 문예대에서 내가 그렇게 부족하다고 느껴 공부해 보고 싶었던 분야를 위한 프로그램(한국어 교원 양성 과정)이 개설되어 두말 없이 영사관을 통해 등록하고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재미 한국 학교 협의회에서도 교사 전문성 향상을 위한 집중 연수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국어학(한글)에 대한 원리를 깨닫게 되었다.
배우면서 가르친다는 것은 언제나 나에게 가슴 벅차게 다가오는 기쁨이었는데, 올 해는 그 기쁨을 배로 누릴 수 있어 뿌듯함에, 교수법을 학습자에 맞게 정리를 해보고자 계획을 했는데, 「재외 한글 학교 교사 초청 워크숍」에 북 가주 협의회에서 발간한 「역사 문화 책, 한국을 찾아라 I」소개 및 시범 강사, 홍보 위원으로 추천 되어 서울을 방문하게 되었다.

한양대 에리카 캠퍼스에서, 구주 지역 13개국, 북미 지역 2개국, 아주 지역 12개국, 아중동 지역 12개국, 중남미 지역 7개국, CIS지역 8개국에서 총 175명이 참석하여 재외 한글 학교 교사의 한국어와 한국 문화 교육의욕 고취를 목적으로 일주일간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 되었는데, 나는 각 나라의 대표자 및 교장 선생님들께 협의회 발간 역사 문화 책 홍보를 위한 강의를 하였다.
주어진 시간 20분, 책의 발간 동기부터 사용법까지의 많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최대한 쉽고 빠르고 재미 있게 전하기 위해, 「왕소군과 모연수」중국고전 이야기를 동원하며 강의를 하였는데, 의외의 반응이 빨리 왔다. 대표자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신 교장선생님들께서 시간이 되면 시범 강의를 부탁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퇴소하는 날까지 저녁 식사 후, 방을 돌며 책에 대한 자세한 소개 및 시범 수업을 하게 되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모였지만, 그 동안 한글 수업을 하면서 늘 아쉬운 부분은 같았다.
한글 학교 교사로서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기에 갖는 역사 수업의 두려움,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가르칠 수 있는 교재가 막연히 없다는 점 등은 어느 나라던지 동일한 고민 덩어리였다.
교과 과정에 맞춰 유치반 과정부터 고급반 과정까지 시범 수업과정을 경청하던 교사들은 갈증 해소란 표현을 하며 이구동성으로 감탄하며 관심을 갖고 교재 구입을 즉석에서 신청 했다.
특히 CIS 지역에서 온 고려인 3세인 젊은 교사들은 매일 저녁 강의하는 방마다 찾아와 서툰 한국어로 질문을 하며 큰 관심을 보였고, 내 아들과 동갑인 23세의 김 블라디미르는 교재의 단원 명의 뜻까지 필기를 하는 열의를 보이며「세상의 주인」이 자기 이름의 뜻이라고 설명해 주기도 했다.
한글 보급을 목적으로 파견된 분들은 아니지만, 아 중동 지역에 요즘 불고 있는 한류의 열풍으로 현지인들에게 다가가기 쉬운 드라마 등을 통한 접근이 좋은 방법인데, 노트북에 다운로드해 들고 다니지 못 함에 불편했는데, 교재의 교사용 CD를 보며 흡족해 하였다.

그런데, 예정에 없던 청와대 방문이 결정 되었다.
보통 그런 곳에 가면 지정 테이블에 앉아, 지정된 사람만 한두 마디 하게끔 철저한 사전 연습을 시키는데, 분명 가나가 순으로 테이블이 정해지면 제일 마지막 구석진 자리일 텐데, 어떻게 기회를 만들어「역사 문화 책 」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을까 고민하였다.
생각대로 구석진 자리, 정해진 발표자 외에 두 명의 발언자에서도 선택되지 않아, 온통 기회를 잡을 생각 밖에 없었는데, 대륙 별로 사진 촬영이 있다 하기에 무조건 앞쪽 줄에 섰지만, 앞줄은 지정석이라 뒷줄로 또 밀렸다. 사진 촬영 후, 내려 올 때 기회를 잡아 다른 대륙의 교사들이 줄을 서는 동안 김윤옥 영부인께 책에 대해 설명한 후, 한 권 드리고 싶다고 하자 제지를 하여, 기회를 엿보았다.
모든 사진 촬영이 끝난 후, 재외 동포재단 권영건 이사장님을 앞세워 다시 잠깐 만나 보충 설명을 드리니, 주변의 제지를 뿌리치는 장면을 보셨는지「그 용기로 계속 힘써 주세요」하시며 비서실로 책을 보내 달라고 하셨다. 일단의 성공, 퇴소하는 날, 총알 택시를 타고 나는 홍보대사로서 책임을 완수 했다.
저녁 시간을 활용하여 책을 소개할 때는, 그 동안 학교에서 내가 수업 했던 자료들을 보여 주며 이렇게 수업을 했었는데, 「역사 문화 책 I」의 발간으로 인해 보다 더 좋은 자료들로 수업할 수 있다고 덧붙여 설명하기도 했다.
열심히 책을 소개하고 있던 어느 날 저녁, 「한글 날 특집 다큐 팀」이라는 PD가 한참을 지켜 보더니 2,30분 정도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책을 출판 하게 된 동기, 교재 사용법, 교재 호응도 등 다양한 질문에, 나는 정성을 다해 대답하며 촬영에 임했다. (YTN 한글 날 특집, 「한글, 세계를 품다」로 방영 됨.)

워크숍이 끝나고, 개인적으로 다문화 가정 학생들을 위한 공부 방 몇 곳을 방문 했다.
아직 한국 말이 서툰 어머니와 자녀들이 하루 세 시간씩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기회를 얻어 오전 오후 두 곳에서 세 시간씩 수업을 했다.
역사 문화 책의 빈 지도에 살고 있는 곳, 가 보고 싶은 곳을 표시하며 지역 특산물까지 찾아 보고, 김치 담그는 법, 처음 담그며 겪은 일등 이국 생활을 이야기하다 보니 서로 위로자가 되어 가고 있어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
모교를 방문하여 유학 온 중국 학생들을 도서관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우리 교재의 선덕여왕 부분에서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내가 벌써 역사 학자가 되어 있었고 가지고 간 책이 한 권도 없어 기부를 하지 못함이 못내 아쉬웠다.
귀국하여, 워싱턴 DC의 초청에 협회에서 또 추천을 해 주셨다.
전체 강의 역사 문화 한 시간 40분, 분 반 강의 SAT II 한국어 두 시간이 주어졌다.
워싱턴 DC는 고학력의 분들이 계신다는 정보를 갖고 더 많은 준비를 하고 갔다.
이미 서울에서 강의를 한번씩 들은 교사들이 있어 그 분들의 소개로 이미 교재에 대해 듣고 있는 분들이 많았고, 내노라는 역사 학자들도 계셨고, 미 현지 정규학교의 교사도 계셔서 시간을 잘 활용하면 효과가 배가 되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데 강의 중 돌발의 질문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 질문을 무시해도 괜찮을 만큼 나는 사전 준비를 해 가서 두렵지 않았다.
워싱턴 DC 지역은 워싱턴, 메릴랜드, 버지니아 지역이 연합된 곳으로, 미 정치 일 번지 지역임에도 우리의 역사 문화 교재는 꼭 필요하고 유용한 교재임이 다시 한번 인증되었다.
이곳을 다녀오며, 정저지와 (井底之蛙), 학생들에게 늘 가르쳤던 사자성어가 생각나는 출강이었다.
시애틀은 올해 두 번을 다녀 왔다.
집중 연수를 받기 위해 한 여름에 다녀 왔고, 집중 연수를 하기 위해 결실의 계절 가을에 갔다.
역사 문화 교재로 하는 한글 수업, 전체적인 수업 과정 등, 네 시간을 쉬지 않고 연속으로 강의를 하며 그 동안 한국 학교에서 배우며 쌓은 경험을 나누는데, 선교지로 다음 주에 떠나는 분께서 강의를 들으시다 질문을 하셨다.
혹시 그 교재 선교지에 바칠 의사가 없느냐 고.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 있습니다.

그 동안 쉬지 않고 학생들을 만나면서 배우고 가르치던 것이 이 가을 이렇게 결실로 맺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하며, 어디든지 언제던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서 배우고 경험한 것을 이제는 즐겁게 풀어 놓아, 교재를 사용한 모든 분들이 이 교재가 한국을 알리는 문화 외교서이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게 될 그날까지 함께 하고 싶다.

Tuesday, November 23, 2010

가을 편지

1980년 5월 18일 이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던 친구를 올 여름 한국 방문 때, 만나게 되었다.
시를 무척 좋아하던 친구는 30년 전 그 모습 그대로 나왔다.
왁자지껄한 가운데 주머니에서 너덜너덜한 작은 수첩을 꺼내, 시 한편을 읽어 준다.

가을엔
맑은 인연이 그립다.

서늘한 기운에 옷깃을 여미며 / 고즈넉한 찻집에 앉아
화려 하지 않은 코스모스처럼/ 풋풋한 가을향기가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 그립다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차 한 잔을 마주하며 / 말없이 눈빛만 마주보아도
행복의 미소가 절로 샘솟는 사람

가을날 맑은 하늘빛처럼 / 그윽한 향기가
전해지는 사람이 그립다

찻잔 속에 / 향기가 녹아 들어 / 그윽한 향기를 오래도록
느끼고 싶은 사람

가을엔 / 그런 사람이 그리워진다

산등성이의/ 은빛 억새처럼 / 초라하지 않으면서 / 기품이 있는 겉보다는
속이 아름다운 사람

가을에 억새처럼 출렁이는 / 은빛 향기를 가슴에 품어 보련다.

시를 잘 쓰던 친구라 당연히 친구의 작품인 줄 알고, 안경의 초점을 맞춰 가며 깨알처럼 적힌 시를 천천히 음미하며 낭독하는 중에, 요즘 유행하는 최신식 전화겸용 컴퓨터까지 되는 작은 패드를 손가락으로 밀 듯 무언가에 집중하던 친구가 하는 말, “아! 이 분” 그럴 줄 알았다는 투다.
이외수의 ‘가을엔 맑은 인연이 그립다.’ 란 시였다. 까르르 터지는 웃음은 대학 신입생이라 해도 손색이 없고, 50을 넘긴 중년이란 표현이 무색했다.

늦가을의 파란 하늘을 쳐다 보니 여름에 읽었던 그 시가 생각나며, 함께 한국 학교 교사를 하셨던 박혜서 선생님이 떠올라 그 시를 메일로 보내 드렸더니, 뜨끈 뜨끈하게 도착한 선생님의 마음, 「miss you~ 」라 써 있는 파란 카드와 함께 한편의 시를 선생님도 보내 주셨다.

수확의 가을이 끝나면 / 나무들은 잎을 떨구어
자신들의 시린 발목을 덮는다.
바람이 불면 세월의 편린처럼 / 흩날리는 갈색 엽신들.

모든 사연들은 / 망각의 땅에 묻히고
모든 기억들은 / 허무의 공간 속에 흩어져 버린다.

나무들은 인고의 겨울 속에 / 나신으로 버려진다.

낙엽은 퇴락한 꿈의 조각들로 썩어가지만 / 봄이 되면 다시금 푸른 숲이 된다.

숲의 영혼을 덮어주는 이불이 된다. (낙엽 / 이외수)

친구가 읽어 준 시와 선생님이 보내 주신 시를 연결하여 몇 번을 읽으며, 가을로 빠져 드는데,
논어 학이편(論語 學而篇)의 명언 중 명언이 기억난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공자 가라사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그렇다.
벗이 있어 생각을 함께 나눔이 이렇게 큰 기쁨이 되어짐이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가슴 깊이 느껴진다.

Friday, October 29, 2010

Mr. Rogers’ Neighborhood

언젠가, 아들은 컴퓨터로 열심히 무엇을 보느라 부르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정신 없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궁금하여 가까이 가서 보니, 체크 무늬 모직 스웨터를 입은 미스터 로저스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도 컴퓨터 속의 후레드 로저스가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넋 놓고 보고 있었는데, 어느 새 딸아이도 함께 합석을 하여 미스터 로저스가 하는 말에 숨을 죽이며 듣고 있었다.
「다 큰 애가 뭐 이런걸 보느냐」는 질문에 아들은 어렸을 적 「Mr. Rogers’ Neighborhood」은 엄마가 가르쳐 주지 않은 모든 것, 새로운 물건들의 사용 방법, 일반 생활의 기본 상식, 예절 등을 가르쳐 준 TV 프로그램이라면서 지금도 컴퓨터에 저장을 해 놓고 그 때를 생각하며 자주 보곤 한다고 하니, 딸도「맞아!」하며 맞장구를 친다.
돌이켜 보니 그렇다.
미국 생활이 생소한 상황에서 아이는 태어났고, 일은 해야 하는 형편이니 교육 방송 격인 채널 9을 아이에게 계속 틀어 주게 되어, 아이는 자연스럽게 이 프로가 바로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 되었고, 이 프로를 통해서 미국을 배우며 경험하게 되었다.
동생이 태어나도 상황은 변하지 않아 두 남매가 늘 함께 보면서 곧장 잘 따라 하며 미국의 문화에 적응되어 갔다.
서너 살 무렵, 아이는 갖고 놀던 작은 장난감들을 줄을 맞춰 정리 정돈 하며 무어라 하기에 무슨 소리인가 물으니 미스터 로저스가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고 하여 놀란 적이 있었다.
그 때 잘 배워 습관이 들어서인지, 지금도 혼자 사는 아파트에 가 보면 기가 막힐 정도로 정리 정돈을 철저하게 해 놓고 살며, 이웃에 대한 예의, 예절이 반듯하여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런데, 요즈음 학생들은 사뭇 다르다.
「Mr. Rogers’ Neighborhood」와 같은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아서인지 부모님이나 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않아서인지 정리 정돈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수업 후에도 자기 물건이나 앉았던 의자조차도 아무렇게나 두고 교실을 도망치듯 떠나고, 심지어는 데리러 오시는 부모님들도 이런 상황을 묵인할 때가 많다.
사용한 컵도 책상 위에 그대로 놓고, 사용한 냅킨 또한 바닥에서 뒹굴어도 줍는 경우가 흔치 않고, 여럿이 모여 함께 간식을 할 때도 어른들이 들기 전에 불쑥 손을 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분명 함께 하는 간식이면 서로 적당 량을 나누어 가져가 먹는 것이 보이지 않는 약속인데, 주변 사람 생각 않고 혼자만 야금 야금거려도 주의를 주지 않으니 가끔은 교사로서 훈계를 하면 서운한 듯 몇 주 영 불편하다.
특히 한국 학교 수업 시간 지키기는 가장 어려운 듯, 첫째 시간 수업은 거의 자유 시간이 될 때가 많다. 수업 준비물과 숙제도 학부모님과 자녀가 서로 떠밀며 탓만 하면서, 모르쇠를 잡는다.
그러면, 이 학생들이 가정과 미국 정규 학교 생활도 이럴까?
대부분 부모님들께서는「절대 아니다.」라고 대답하신다. 무엇이 어디에서 잘못된 것일까?
왜 한국 학교에서만 학생들의 행동이 이런 것이지?
교사들은 매 시간 목에 힘줄이 돋도록 목소리 높여 설명을 하고 부탁을 하며「절대 하지마!」「절대 안 돼!」를 외치는데 왜「절대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다정하게 얼굴을 마주 보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을 하며, 몇 번씩이라도 몸소 행동으로 보여 주는 후레드 로저스가 문득 생각이 난다.
한번의 설명이 두 번째는 높아진 목소리 톤으로 하는 훈계로 바뀌고, 세 번째는 마지 못해 짜증 섞인 명령을 하는 권위 있는 교사로서 교실을 지키기에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었는지 되돌아 보며, 학년 초 우리 반 학생들과 함께 서약한 서약서의 내용에 다시 한번 나를 비추어 본다.
「우리는 세종한국학교 태극기 반입니다.
우리는 선생님과 모든 반 친구들을 존중하며, 우리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집니다.
한국 학교에 와서 많이 배우고 열심히 공부하며 숙제를 잘 하겠습니다.
학교의 약속을 지키고 훌륭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자랄 것입니다.」

Monday, October 18, 2010

깻잎 머리

대학 때 가정교사를 했던 학생의 어머님께서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오셨다.
3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여전히 멋쟁이이신 어머님은 광수(그 개구쟁이 학생, 지금은 치료 잘 한다고 시내에서 입 소문난 유명한 치과 의사)의 소식을 전하며, 광수가 꼭 선생님께 자장면을 대접해 드리라 했다며 함께 가자고 하시기에 따라 나섰다.
동네에서 제일 비싸다는 중국집으로 가서 선풍기 바람을 쐬며「이 더위에 무슨 자장면을 먹는담?」하는 생각뿐이었는데, 때를 맞춰 광수가 전화를 해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별이 빛나는 밤에」를 청취하는 듯 감미로운 목소리가「선생님~」을 불러 주며, 꼭 자장면과 탕수육을 드시라고 한다.
목소리에 취해 얼떨결에「왜?」라고 물으니, 과외 받던 때, 시험만 끝나면 사주셨던 자장면에 대한 선생님의 추억이라며, 출국 전 치과에 들려 진료 받고 가라는 말까지 한다.
맛보다 감동으로 자장면과 탕수육을 남김없이 먹고 나오는 데, 머리가 벗겨져 더 늙수그레한 깡마른 남자가 배달 통을 들고 들어오며, 나와 동행하신 분들을 보고 웃으며 다가오다 내 쪽을 보더니 반가움이 역력하게 내 이름을 부른다.
순간 움찔 놀라 귀를 의심했는데,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다닌 동창생이었다.
듣기로는 대기업에 다닌다고 했었는데, 강제 명퇴한 후 고향에 와서 식당을 운영한다고 했다.
얼마 전, 동창회에서 내 얘기가 나왔다며 배달 밀렸다고 성화인 부인의 잔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40여 년 세월을 한달음에 쏟아 내며, 내 어릴 적 모습을 기억하며 아직껏 변하지 않은 깻잎 머리(지금 용어로)를 말했다.
지금에야 헤어 스프레이도 있고 젤도 있고 폼도 있지만 그 당시는 보통 앞머리를 일자로 짧게 자르던지, 옆으로 넘겨 실핀으로 고정하는 정도였는데, 최신 유행인 「윤복희」
스타일로 멋을 한껏 부리던 나는 앞머리를 비스듬히 내려 동백기름을 발라 머리를 고정하고 다녔었는데 부러움의 대상으로 눈총을 자주 받곤 했었다.
친구는 여기 저기 전화를 열심히 하면서 반창회를 열자고 했다. 내 일정은 무시한 채.
연결된 전화를 건네며 거울 보듯 통화하라고 하기에 신기함에 보니 영상 통화였다.
초등학교 4~5학년 때 담임 선생님. 내 기억에서도 한번도 지워지지 않았던 선생님, 선생님께서도 일거수 일투족 기억해 주시며, 아직도 앞머리 내리고 다니냐고 물으신다.
너무나 뵙고 싶고 그리웠던 선생님이셨는데, 선생님께서 먼저 눈물을 보이시며 보고 싶었다고 하신다.
점심 장사 망쳤다고 투덜대던 안주인도 내 동생의 동창생이라며 얼음을 동동 띄운 수박 화채를 들고 나와서 언니라고 부르며 살갑게 군다.

한 나절 감동의 물결이 가슴에 와 닿아 하루가 아쉬움에 일렁거린다.
나도 교사가 되리라고 다짐하도록 했던 선생님.
50이 넘은 제자를 아직까지도 일일이 기억하며 칭찬해 주시고 걱정해 주시는 선생님.
이런 든든한 선생님이 계시기에 오늘의 내가 있고, 선생님께서 나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나도 우리 아이들을 오래도록 기억하며 늘 지켜주고 칭찬으로 이끌어 주는 그런 교사, 또 학생들의 기억에 남아 있어 한번쯤 뵙고 싶어하는 그런 교사가 되기를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